어린시절은 어땠나요?
저의 어린 시절은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중학교 때 까지는 그냥 여타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자랐어요. 근데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우연히 서류를 뗐는데 거기에 엄마 이름이 없는 거예요. 그때에 처음 알았어요. 우리 엄마가 둘째 부인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때에 큰 충격을 받았죠. 어린 마음에 너무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좀 내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것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올라가기 전에 아버지가 간암으로 빨리 돌아가셨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학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어요. 겨우 고등학교 나와서 사회에 던져졌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한 뒤에 뒤늦게 학업에 열의가 생겨 배움을 이어 나갔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인천 지주의 자식이라고 할 만큼의 금수저셨고, 저희 어머니를 많이 무시했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께 생활비를 전혀 주시지 않으셨죠. 그러다 보니 저희 형편이 아주 어려웠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을 등한시하고 굉장히 권위적인 분이셨어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여자도 돈을 꼭 벌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꼭 커서 20억을 벌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요. 당시 어린 마음에 ‘20억 정도 되는 건물이 하나 있으면 먹고살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저희 어머니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열심히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으신 분이었어요. 아버지는 자식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분이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저희 4남매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고요. 당시 어머니는 한쪽 팔이 많이 불편하셔서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정도이셨는데, 한쪽 팔로만 저희 4남매를 키워주신 것 같아요. 어머니의 노력이 없었다면 제가 절대 이렇게 잘 성장하지는 못했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 인생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별로 한 게 없더라고요. 남편한테는 20억 벌어준다고 큰소리쳐 놨는데 결과는 남편 등에 빨대만 꽂고 살아가는 제 모습. 해 놓은 건 없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는 상태였죠. 그래서 막연히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공인중개사였어요. 공인중개사를 준비한다는 지인의 전화를 받고 저도 뭔가 용기가 생기더군요. 정년도 없고 내가 사장이고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도전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5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해 합격하고 이제 일을 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훨씬 사태가 심각했어요. 공인중개사 열풍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몰렸고 매물에 비해 경쟁은 너무나도 치열했죠. 돈이 안 되는 구조였어요. 물론 돈 버는 사람은 있죠. 하지만 정말 극소수고, 시기적으로도 좋지 못했던 것 같아요.
SGM 사업을 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같이 사주를 공부하던 친한 지인이 저에게 화장품을 소개해줬어요. 구매하고 사용을 하다 보니 얼굴이 점점 예뻐지는 거예요. 젊어지는 느낌도 들고요. 제가 직접 변화를 느끼다 보니 일단 제품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점점 화장품을 넘어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러다가 SGM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고자 하는 확신이 생긴 일이 생겨요. 저는 집에서 항상 남편에게 헌신적으로 대했고, 온갖 살림을 도맡아 했습니다.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고 재산관리도 남편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남편이 은근히 저를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살던 와중에, 남편 생일날이었어요. 제가 조금 비싼 명품을 남편에게 선물했는데, 선물을 딱 보더니 “이거 내가 준 돈으로 산 거잖아”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정말 심장에 대못이 박히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타이밍에 제가 받은 수석대표님의 메세지가 바로 ‘경제적 독립이 없는 한 인격적 독립도 없다’였습니다. ‘이거다’ 싶었어요. 내가 무조건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구나. 깨달음을 얻었죠. 그 후로 저는 정말 죽기 살기로 사업에 임했습니다. 저는 이 만남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네요. 인생역전.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남편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 파워매니저를 하고 집에 화장품 배송이 온 뒤였어요. 남편이 화장품을 보자마자 한 말은 “미쳤구나. 내가 너 못 먹여 살릴까봐 지금 화장품 팔려고 하냐?”였어요. 어느정도 예상했던 답변이었죠. 저는 인내했습니다. 조금 더 확실하게 남편한테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자리를 잡고 말을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요. 그러다 몇달 뒤, 남편이 제가 하는 일은 인정하게 되는 사건이 생겨요. 2020년 연말에 제가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는 일이 생겼어요. 저희 남편이 제가 늦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뭐하다가 이제 오냐 더니 집을 나가버리더라고요? 저는 너무 당당했죠. 정말 일만 하다 왔거든요. 그것도 가족을 위해서. 이전 같았으면 어르고 달래서 집에 데려왔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연락도 하지 않았죠. 저는 너무 당당했거든요.
그러더니 며칠 뒤에 집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남편을 소파에 앉혀 놓고 제 통장을 보여주며 딱 말했어요. “나 돈 잘 번다.” 남편이 내심 놀라더라고요. 그리고 한마디 더 했죠. “나 사업하느라 시간이 정말 너무 부족해. 당신이 아침 저녁밥 좀 차려줘.” 처음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남편이 그다음 날 시장에서 장을 봐서 오는 거예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아침, 저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너무 신기하고 고맙죠.
변화된 삶은 어떤가요?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학원 10개를 보내던 미친 엄마였어요 제가. 그때는 그게 좋은 거고 최고의 부모라고 생각했죠. 제가 공부를 하지 못했고, 학업에 대한 결핍도 있었기 때문에 제 아이만큼은 그런 것 없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저희 아이가 유학을 다녀와 입시에서 한번 낙방했어요. 그런 아이에게 “너 빨리 공부해. 좋은 대학교 꼭 들어가야 해”라며 몰아붙이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분명 제가 경제적 독립을 이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아이가 굳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할 때까지 내가 부담 없이 도와줄 수 있는 엄마. 남편에게 내가 번 돈으로 무엇이든 선물해줄 수 있는 아내. 시부모님께 용돈을 아무런 부담 없이 드리는 며느리이자 주변 어려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이 모든 것이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었기에 가능해졌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목표
저와 함께하는 파트너들과 같이 저처럼 성공할 수 있게 만드는 리더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리더는 더 하는 사람이다. 내가 먼저 배려하고 베풀고 손해 보고 솔선하고.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끌어안아 함께 가는 사람이다.” 최배견 대표님께서 하셨던 말씀이에요. 저는 그런 리더가 되는 것을 2022년 그리고 2023년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